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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케이안 (@bj_antoniok)

얼어붙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시유가 타고 있던 함선에 문제가 생겨 항로를 바꿔야 했다. 추격대를 따돌리려고 속도를 높였는지 엔진이 과열되었기 때문이다.

 

[경고. 무리한 운행으로 엔진이 과열되어 더는 가동할 수 없습니다.]
 

"젠장! 겨우 벗어나서 안심되는데 어째서?"
"대장님, 우리 이제 어쩌죠? 미사일을 피하느라 발사한 구명정도 이제 없잖아요. 수리공도 아반나 말고 없다구요."

 

고양이귀 머리핀을 찬 소녀가 함교에서 다급하게 중년으로 보이는 대장 곁에서 발을 둥둥 굴러보았지만, 그럴수록 함선 상태는 더더욱 악화될 뿐임을 뒤는게 깨달았다. 침착하자. 분명 방법이 있을......

 

[인근에 거주지로 보이는 행성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행성은....]
 

"어쩔수 없지. 여기라도 착륙한다. 시유야, 꽉 잡아! 부관, 비상착륙 프로토콜 가동해!"
 

[비상착륙을 시작합니다.]

 

어쩔수 없었나 보다. 원래대로라면, 무사히 빠져나온 함선을 '천국'이라 불리는 행성으로 가서 거주민 대표인 아리엘 핸슨 박사에게 사정을 말해 살려고 했었다. '저그 바이러스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모르겠으나 함선에 문제가 생긴 지금은 여기라도 착륙해야만 했다. 거주민이 있을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경고. 강력한 충돌이 예상됩니다.]


"다들 꽉 잡아!"

방송을 들은 피난민들이 아무거나 잡는 모습에 시유는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라는 마음을 먹으며 난간을 잡아 충돌을 대비했다. 대기권을 뚫고 들어온 행성은 추운 날씨로 인해 얼어붙었지만, 착륙지 인근에서 거주시설이 보이면 우주선 수리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적대심을 품는 사람이 살고 있다면? 아니면 다 얼어죽었다면?

'젠장, 이런 생각은 하지 마!'

시유의 머릿속에 대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이오닉 능력자라 그럴 만했지만, 알수 없는 행성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시유야, 일단 착륙하고 생각하자!'

함선은 점점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지상이라기엔 너무 얼어붙어 안전할련지 모르겠다. 도중에 얼음 기둥을 스쳐 지나간 점도 있고, 사람 몇몇이 그 충격으로 인해 죽었으니. 점점 불시착하려 한다.

 

[함선 내구도 60%. 함선 내구도 60%...]


"으으......."

반복되는 말이 들려 일어난 시유는 머리를 움켜잡고 함교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종 기능은 먹통이고, 우주 지도를 붙잡았던 대장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서 의료상자를 챙기려 달려갔으나, 그는 오히려 제지했다.

"시유야,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같이 헤이븐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쿨럭, 쿨럭!"

대장은 머릿속으로 말하면서 깊은 상처를 가렸다. 비상착륙을 하려다 어디에 부딪혔거나 관통당한 모양이다. 그걸 본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죽지 마세요! 저흰 아직 대장님이 필요해요!"
"아니야.... 날 겨우 살려낸다 해도 네게 짐이 될 뿐이야. 게다가 너도 리더쉽이 있잖아. 이제 내가 네게 마지막 선물을 줘야 할 것 같구나..."

 

그는 바지 왼쪽 주머니를 가리켜 시유에게 꺼내라 지시했다. 그녀가 집어든 물건은 다름아닌 지휘관이라면 가져야 하는 함선 지휘권과 지휘관 수첩이었다. 그 뜻은, 새로운 지도자가 시유라는 뜻이니라.

"...데이비슨의 계획을 먼저 알리고 도망자를 인솔하는 모습보고 니가 차기 지도자가 될 그릇임을 알아봤어. 덕분에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 왔는.... 쿨럭쿨럭."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이끌었어도 저는 리더쉽이 부족해요. 그러니 제게 이런 짐을 지우지...."
"....수첩을 잘 보고..... 어떻게든 핸슨 박사에게....."
"대장님!!!!"

 

말하다 말고 축 늘어진 대장을 본 시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민간인이 탔던 곳에 들렸는지 생존자들이 함교로 부리나케 달려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제 시유가 우리 대장인가봐."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니...."

 

시유와 같이 함교에 있던 아반나와 올리버도 고개를 숙여 대장을 추모했다. 불시착으로 죽은 승객들을 수습한 뒤, 이 행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졌다. 누가 사는지, 거주민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조사하려고 지원자를 찾아봤다.

 

"혹시 근처를 정찰하실 분 없나요? 아니면 이곳 지리를 아시는 분은요?"

 

괜히 물어봤나 싶다. 온전한 사람이라곤 자신과 올리버, 아반나 뿐이고, 경상 입은 유카리도 있지만 나가기를 거부하는지 안 나오고 있다. 시유 자신이라도 나설 수밖에 없나 싶지만 이동수단이 온전한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들을 내버려두기엔 위험 부담이 크고.

 

"내가 갔다올게."

 

방금 응급 치료를 마친 동네친구 옌허가 오른손에 시체매 열쇠를 들며 걸어나왔다. 이 날씨에 시체매 타고 가기엔 무리인 것 같은데 괜찮을까?

 

"너 괜찮겠어? 방금 상처 회복되었잖아."
"그리 걱정된다면 인근만 다녀올게. 너는 여기서 쓸만한 게 있는지 보고 상황맞게 조치해줘."

곧바로 격납고로 들어가 시체매를 작동하러 간다. 뭐, 인근만 보러 간다면 상관 없지만 다치지만 말라고. 함선 주위를 돌아본 시유는 다음으로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아반나에게 로봇으로 쓸만한 물건을 수집해 달라고 부탁하고, 유카리에게는 환자를 돌보라 했다. 그녀의 상처는 뭐 괜찮지만 이 추위에 모두 견딜려나?

 

"시유, 여기 좀 춥다...."
"나도 마찬가진데, 불을 뗄 수 있을까? 불이 있다 해도 뗄감이 그렇잖아."
"그러게... 한번 찾아볼게."

 

자기보다 어린 나이에 할 일을 하러 가다니.... 시유는 미안한 마음으로 장갑을 껴 화로를 만들어 올리버가 구해다 줄 뗄감을 기다렸다. 식량도 얼마 남았을지 모르고, 무턱대로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행성에 지나갈 함선이라도 교신이 될 방법이... 어라? 이거 광물지대 아냐?"

 

예전 연합이나 자치령이 이걸로 각종 병기를 만들었다고 대장에게 들은 바 있었다. 베스핀 가스도 추가하면 우주선도 가능할 테니, 캘 수 있는 방법만 찾아보자며 폐허 더미로 간다. 수리 도구를 개조해 채집하고, 연구하여 지게로봇 다량을 만든다면..... 광물 건은 해결된다. 베스핀 가스는 정제소에 제련해 놓은 통을 직접 날라야겠지만.

"아, 이건 쓸만하겠다."

 

각종 드릴과 용접 기기를 주워 화로에 갖다 놓고, 덤으로 찾은 화염방사기에 화로를 데울 준비를 마쳤다.

 

"시유, 이걸로 뗄감 쓰면 될까?"
"아크튜러스와 관련된 물건이네. 좋아, 임시로 열을 쬐는 데 나쁘지 않지."

 

올리버가 가져온 자치령 선동 깃발을 화로에 우겨넣고 화염방사기를 켜 열을 올린다. 임시지만 언젠간 베스핀 가스로 온기를 올려야 한다. 이를 알 기술자가 있어야 할 텐데......

 

"우리, 기술자가 있을까?"
"글쎄.... 있다 해도 좀 다쳤다면 힘들겠지?"
"유카리가 찾아 회복시키길 빌어야지."

 

멩스크 선전물을 태우면서 앞으로 일을 걱정해 본다. 식량과 교신, 잠 잘 곳 중에 무얼 먼저 할까 고민을 하다 채집 도구를 본 시유는 들고 일어나 광물을 캐기 시작한다.

 

"너 설마 광물 캐게?"
"광물이 있어야 우리가 뭐 만들던 하지 않겠어? 나라도 캐서 뭐라도 만들어야지. 옌허가 돌아올 때까지 할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
"알았어. 하나 더 생기면 나도 주라. 도와줄 테니."

 

광물 더미를 캐서 제작툴로 다가가 새로운 채집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다. 시간이 얼마 안 걸려서 올리버가 쓸 도구는 금방 마련되었고, 나머지를 위한 도구를 마련할 때까지 만들어냈다.그렇게 10명분 도구가 만들어졌을 무렵, 옌허가 돌아와 보고했다.

"사람들이 다쳐서 너희만이라도 캐는구나.... 내가 한번 봤는데 우르사돈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찍혀 있더라. 수가 얼마 되는지 모르겠어."
"우르사돈? 우리가 브락시스로 떨어졌단 말이짆아?!"

 

하지만 옌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정찰갔던 곳에는 자치령이나 프로토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소총이나 탄약도 확보해놔야 겠어. 혹시 모르잖아."
"그래. 도구 만드는데 쓰이는 광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알아둘게."

 

프로토스나 다른 생존자가 있다 해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치령이나 저그가 있다면 100% 싸워야 한다. 저들은 폭정으로부터 도망쳐온 사람이라 도망자를 보면 분명 학살하려 할 게다. 일단은 준비를 하기 위해 광물을 캐야겠지.... 옌허까지 포함한 셋은 아침이 될 때까지 안 재고 일이나 했다. 며칠동안 시유 등이 캔 자원 덕분에 생존자에게 필요한 물품은 충분해졌다. 옌허는 화염차로 개조한 시체매를 타고 돌아다녔고, 어느정도 향상된 의료가기 덕분에 유카리 자신을 포함한 환자는 거의 회복되었다. 하지만 여기가 정말 브락시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시유는 최근에 만든 계측기를 가동시켰다.

"여기가 어떤 행성인지만 알면 좋을 텐데....."

 

긴장하며 화면을 바라보는데, 결과를 보고 깜짝 놀라야 했다. 여기는 브락시스가 확실히 아니지만 테란의 흔적이 보였다.한기가 왔다갔다하는 여기서 민간인이 있다면 여기가 어떤 행성인지 알 수 있으리란 믿음이 생겼다.

 

"아반나, 건물 이륙은 가능해?"
"아직 한번 하지 않았는데 왜? 또다른 광물지대를 찾았어?"

 

시유는 화면에서 발견된 테란 구조물을 가리켰다. 운 좋으면 식량과 교신기를 찾아 구조를 요청할 수 있으리라. 건물을 들어올리는 기술까지 개발했고, 한기도 1정도 되니 충분히 갈 수 있다.

 

"그래도 일단 정찰을 보내자. 자치령이 와서 매복할 가능성도 있어."
"좋아. 수송선 한 척을 보낼게."

 

시유는 즉시 원격 조종이 가능한 전투로봇을 수송선에 태워 포착된 장소로 보냈다. 안전이 확인되면 들어가서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 생존자도 마찬가지고.

 

"목적지에 도착했어. 내려서 한번 볼까?"

 

문을 열어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어째선지 을씨년스러웠다. 화면을 같이 보는 올리버, 유카라 등은 뭔가 잘못 되었음을 느낀 모양이다.

 

"여기... 생존자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러게... 확인을 계속 할 거야?"
"모.... 모르겠어. 자치령 로고는 없지만 우리처럼 도망치다 죽은 사람이 세웠다면 우리도...."
"너무 확신하지 마."

시유는 그런 말을 하면서 다른 문을 열었는데, 가동 중인 인체연명장치 하나를 찾아냈다. 들어간 사람은 카일린이라는 소녀였고, 기계가 작동 중인 걸 보면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찾으려 했지만 전부..... 죽고 말았다.

"얼음 폭풍 때문인가 봐. 기록을 봤는데 브락시스만큼 춥지만 폭풍이 너무 잦아들어 더는 살아남을 수 없었대. 하지만 이곳 대장은 카일린이라도 살리고 싶어서 아무도 모르게 캡슐 안으로 넣고 자살했지 않았나봐."

 

그들도 아크튜러스로부터 벗어나서 여기로 도착해서 기지를 세웠는데, 갑작스런 추위와 대장에 대한 불신으로 서로 싸우거나 이탈해서 전부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안 그래도 옌허가 정찰가다 발견한 시신 몇 구를 보고해 묻었지만, 일부는 짐승에 의해 뜯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우르사돈.... 시유가 내린 결론내렸지만, 내분으로 이탈한 줄은 누가 알겠는가? 로봇을 다시 수송선에 태워 돌아오게 했는데 올리버가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시유, 큰일났어! 사람들이..... 사람들이 떠나가겠대!"
"뭐?!"

 

머릿속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갈 희망이 없지 않은데도 벌써 이탈이라니..... 폐허 속을 이끌었던 대장의 결말과 같은 순간인가.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떨리듯 물어봤다.

"왜.... 왜 떠나는데?"
"유카리에 의하면 부족한 식량과 매서운 추위, 구조되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빠졌나 봐. 내가 듣기로는 죽은 대장에 대한 원성이 높아."
"안돼..... 너무 확신을 가지...."
"""시유!"""

 

어린 대장은 큰 충격에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른 동료가 흔들어 깨우지만 일어나지 못한 듯하다.

....눈을 들어보니 임시 대장실이었다. 동료들이 자신을 여기로 데려와 안정을 취하라는 의도로 그녀를 눕혔나 보다. 옆에는 유카리가 앉아 있지만,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차 보였다.

 

"....일어났구나. 아반나와 옌허가 널 여기에 눕히고 사람들을 모아 불만을 잠재웠어. 하지만 며칠 새에 떠나겠다는 사람이 나올지 모르겠어."
"다행이다만.... 여기에 온 지 며칠 됐어?"
"7일."

 

시유는 한번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유카리가 제지했다. 공복인 상태로 곧바로 일어나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또 쓰러지면 의무실에서 일어날까 두려워서란다. 어제 불화에 대한 충격으로 쓰러진 친구를 그리 걱정하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괜찮으면 식사라도 가져올까?
"아니... 혼자 있게 해줘."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배고프지 않아. 요즘 먹는 고기가 지겹기도 해."

 

의사 담당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방을 나섰고, 그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시유는 이불 속에 들어가 울기 시작했다.

 

"흑흑..... 대장님.... 저 어쩌면 좋죠? 사람들이 절 믿지 못하는지 제 곁을 떠나겠대요.. 이럴 줄 알았으면 행성에 남아 자치령에게 시달리는 게 낫겠어요...."

 

탈출하자고 제안한 이가 무능력에 주저앉았다. 하도 희망이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혹은 어떻게 빠져나갈까... 카일린을 깨워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왜 내가 대장이 되어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이들을 이끌 수 있을까 좌절하려는 그때, 머릿속에 지휘관 수첩이 떠올라서 주머니에 꺼내 펼쳐봤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될련지...."

 

울음섞은 말투로 수첩을 읽기 시작하는데, 그도 한때 무능력에 무너졌었나 보다. 전부 부정적인 내용으로 적혀있는데, 마지막 종이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오늘 부하 하나가 이런 말을 해 줘서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계속 주늑 드는 모습을 보이면 남은 부하들이 대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누구나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려야 하지만 전 그런 대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덕분에 많은 인원이 함께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집의 기둥이고, 부하들은 지붕인가 보다. 내가 쓰러지면 지붕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걸 읽는 그대는 나와 같은 처지를 겪어도 좌절하지 않길 바란다. 실패는 나아가는 데 겪는 과정일 뿐이다.]

 

시유는 수첩을 덮고 여태까지 있던 일을 돌이켜봤다. 채광 도구와 사냥용 도구 제작, 추워지면 온열 시스템을 켜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유지하기,정찰을 보내 식량 확보하고 우르사돈이 몰려오면 솔선수범으로 막아내고.....

"....빠져나갈 가능성을 발견하다."

 

이 중요한 점을 뒤늦게 깨닫다니. 자신의 볼을 때리며 자리에 박차고 일어나 요기하러 식당으로 갔다. 그런 대장을 아반나와 옌허, 유카리가 반겨줬지만 올리버를 뺀 나머지는 의심을 해 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왔을까?', '여길 떠나야 하는데....' 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탁자를 탁 치며 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저희는 여러분을 위해 도구를 만들고, 정찰 등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와서 제 곁을 떠나신다구요? 전 여러분이 필요하다구요."
"아니, 그럼 우리가 병상에 누웠을 때 쟤가 도구 등을 마련했단 말이야?"
"그럼 무능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나?"

 

생존자 다수가 수근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불시착하자마자 생긴 환자 20여 명을 치료해 준 유카리나, 저절로 들어온 날음식을 식랑으로만들어 준 올리버 등이 노력한 덕분임을 서서히 깨닫으려는가 보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한 남자가 시유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뭐 그리 수근수근 거리십니까? 설마 쟤가 한 말 믿으세요? 그럴 시간에 우리 모두 떠나야 한다구요."
"그러는 아저씨는 이 행성에서 뭘 하셨어요? 다친 팔로 사냥을 하셨나요? 아니면 환자들을 도우셨나요? 유카리에 의하면 팔 잃을 뻔했다면서요."
"이 어린 게 무슨...."

 

그때, 어제 아반나와 같이 생존자를 설득했던 옌허가 더는 못 참았는지 권총을 천장에 대고 한발 쐈다. 시유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라는 뜻도 담겨있었지만, 눈에는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띈 남자는 옌허에게 따져들기 시작했다.

"옌허 너, 시유에게 매수당한 모양이구나. 그치?"
"네? 제가 왜 매수 당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시유 편이라구요. 제 친구를 그렇게 판단하러면 저흴 왜 따라오셨어요?"

 

원망 섞인 말이 듣자마자 그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싸움이어서 다행이지만, 올리버는 이러다 유혈사태가 벌어질까 겁이 나서 눈을 찔끔 감고 숙였다. 그저 이 일이 지나가길 바랐지만....

 

[경고. 멀리서 우르사돈 무리가 확인되었습니다. 도착까지는 앞으로 30분.]

 

예기치도 못한 경고 방송에 모두 정적되었다. 중재하려고 일어서려 했는데 우르사돈이 온다니..... 그제부터 기지에 쳐들어 왔어도 시유가 막아내긴 했지만, '무리'라면 사태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같이 막자니 불화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일단 기지 방어를 치른 뒤에 '불화를 잠재우는 대화'를 계속 하는 수밖에 없다.

"아반나, 수송선 몇대 있어?"
"어..... 두 척이 있는데 왜? 벗어나게?"

 

시유는 눈을 부릅 뜨고 생존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에게 선택권을 드릴게요. 저랑 함께 우르사돈을 막을지, 아니면 떠나서 그들에게 잡아 먹힐지. 후자를 고르셔도 이해할게요."

그런 시유를 본 생존자들은 당황하듯 수근수근 거렸다.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장갑이 약한 수송선으로 대체 뭘 하려는지 궁금하는 대화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무기를 장착해서 침입자들을 쏘려는가는 말도 들려온다.

 

"좋아요. 제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실지 판단할 시간을 드릴게요. 마침 아반나가 지게로봇으로 포탑을 세우고 건물을 수리하게 개조했다고 하니, 이 방법을 써야죠."

 

시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반나에게 눈짓을 했고, 친구는 즉시 대장을 따라갔다. 무슨 의돈지 모르지만 방법이 없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지.
 


영하 60도인 바깥에는 올라오는 입구를 막는 수송선 둘과 다수의 지게로봇과 자동 포탑, 그리고 새로 만든 토르를 운영하는 시유와 아반나,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생존자 둘이 힘을 합쳐 거주지를 향해 달려오는 짐승들을 막아내려고 나섰다.

 

"시유, 너 괜찮겠어?"
"나 그럴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줘. 자주포 가능하잖아."
"알았어. 잘 봐라고."

 

아반나가 만들어낸 330짜리 대포를 5km 떨어진 우르사돈 무리에게 날리자, 뭉쳐있던 일부는 한 방에 쓰러졌다. 부하들이 대포로 인해 쓰러지자, 무리를 이끈 우두머리는 크게 포효를 하여 다른 동료를 격려했다. 그래서 미리 설치한 자동포탑을 작동시켰고, 330 대포는 열이 식히는대로 바로 쏘며 진입을 저지했다. 그리고 지게로봇으로 입구를 뚫지 못하게 바리케이트용 수송선을 수리해 침입을 막아냈다. 아반나가 만든 이 토르의 성능을 본 시유는 감탄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거 대단하잖아."
"그러게. 이걸 베이스로 한 양산형 로봇을 만들어도 되겠어."
"그거 괜찮은데? 허락할게."
"고마워. 그리고 돌아와줘서 다행이야."

아반나는 웃으면서 다시 돌아온 대장을 축하해줬고, 이를 지켜본 다른 생존자도 박수를 치며 같이 기지 격납고로 돌아왔다. 격납고에서 내린 이들이 기다리는 건 아까 옌허에게 큰 소리를 쳤던 남성이 묶인 모습이었다. 누가 묶었는지 모르지만 시유에게는 좀 보기 그랬다.

"아니, 누가 아저씨를 묶었어요? 무슨 이유로요?"
"우리가 저놈에게 선동을 당했었는데, 니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우리 판단이 틀려서 우리가 그리 했어. 어떻게 할래?"

이에 그녀는 잠시 고민을 했다. 남자도 솔직한 마음으로 어린 대장을 험담했을까? 한 사람이라도 부족한 시점에서 처형하자니 양심이 찔린다. 그래, 풀어주자.

"전 당신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도록 할게요. 추방이나 처형은 황재 같은 사람이 하는 짓이고, 그건 제가 추구하는 질서가 아니에요. 며칠 동안 베스핀 가스만 캐세요."
"그래. 멩스크라면 이거보다 심하겠지. 널 떠나자는 선동을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어떻게든 여기를 떠나도록 최선을 다해볼게요. 연명캡슐 속 사람을 깨워 자세한 정보를 얻으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선동자를 풀어준 시유는 건물에서 찾은 정보를 생존자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사람들은 불화를 거두고 소녀 대장을 지지했다. 이 방어전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불화는 없으리라 굳게 믿으며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날이 맑아 기온이 올라갔다. 그래서 그제 찾은 지역으로 가서 정착한 뒤, 시유 혼자서 건물 속 연명캡슐 속에서 잠든 카일린을 찾아 깨우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스스로 일대를 조사하거나 방어선 정비, 죽은 이들을 묻어주는 그런 일을 하러 간 상태였다.

"...절 구하러 오셨나요?"
"저희도 함선 파괴되어 여기에 고립 중이에요. 건물을 보니까 오래 지어지지 않아 보이는데, 정보를 알려주세요."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지금 몇도에요?"

카일린이 다짜고짜 온도를 물은 이유가 있나? 고민하는 시유는 망설이지 않고 영하 30도라 말해줬더니, 카일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늦었군요. 앞으로 2-3일 뒤면 얼음 폭퐁이 들이닥칠 텐데, 그때는 우리 모두 죽을 거에요. 제가 연명캡슐 속으로 들어갔을 때와 비슷하거든요."
"네? 그 말 거짓말이죠? 그쵸?"
"믿기 힘들면 한번 중계실에 가서 위성사진이나 보세요. 지금쯤 폭풍이 생겼을 테니까."

같이 중계실로 가서 화면을 키고 사진을 봤는데, 카일린의 말이 사실이었다. 폭풍이 생겨 점점 시유가 정착했던 곳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속도로 보면 예전 정착지는 내일 얼어붙는다.

"말도 안돼. 여기에 방한물품이 될련지 모르겠....."


[시유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기지를 수색하다 헤이븐으로 갈 수 있을 법한 전투순양함을 찾았어! 며칠 동안 수리하면 되겠지만 나쁜 소식은....]

아반나는 침울하게 함선 상태를 꺼냈다. 혼자서 수리하는 데 최소 6일이 걸리고, 단축하러면 미숙한 이들의 손을 빌려야 한단다. 자칫 수리해야 할 부분이 오히려 못 쓸 정도로 망가져 하루 더 연장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원이 한정된 이곳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한단 말인가? 진퇴양난인 이 순간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카일린, 이 함선 있잖아요. 혹시 알고 있었어요?"

시유가 화면에서 보이는 함선을 가리키며 묻자, 카일린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뭔가 아는 바가 있나 보다.

"아니, 노아가 아직도 멀쩡하나요? 부서진 줄 알았는데..."
"함선 이름이 노아에요?"

생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타고 온 노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 함장도 자치령에서 벗어나 여기로 도착을 했지만, 시유보다 어려운 처지를 겪어 대원 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고,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놓은 위성을 발사하여 다른 세력에게 구조를 요청하려 했지만, 도중에 큰 얼음 폭풍을 만나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렸었다. 바로, 여기를 찾아오는 구조대가 어린 카일린이라도 발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명캡슐에 넣고 자신은 폭풍에 휘말리기로....

"...해낸다 해도 가동시킬 수 있다 생각하세요? 작동하지 않은지 좀 되었어요."
"그렇다고 여기서 얼어죽으라구요? 저도 사람들을 떠나보낼 위기로 인해 좌절을 겪었지만 그걸 통해 배운 게 있어요. 좌절하더라도 포기는 하지 마라고. 저흰, 이 함선을 쓸 수 있게 손을 봐서 여길 떠닐 겁니다. 도와줄지 말지는 알아서 하세요."

시유는 무전기를 들어 아반나에게 함선을 고쳐봐라 하고는, 자기 앞에 보이는 마이크를 집어 방송을 시작했다.

"여러분, 지금 얼음폭풍이 우리가 머물렀던 곳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곧 있으면 이곳으로 오겠지만 폭풍보다 무서운 걸 알려드릴게요. 바로 이런 환경에서 동료를 믿지 않거나 버리려는 행동입니다. 불화를 버리고 하나되어 이 날씨와 맞서 싸우면! 우린 반드시 살아남아 여길 떠날 수 있습니다! 활주로에 있는 노아라는 함선을 다시 수리하는데 도와주실 분은 아반나에게 가서 도와주십시오."

방송을 끄고 다시 카일린을 보는데,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미친 짓을 해낸다고? 수리하는 데 4일 정도 걸린다는 소식도 못 들었는가? 라는 생각이 들겠지.

"당신도 도우신다면 환영할게요. 포기보단 낫잖아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죠. 수리해서 여길 뜬다면 당신에게 함선의 이름을 바꿀 기횔 드릴게요."

함선의 새 이름이라.... 카일린이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아마, 노아에 탔던 사람들의 이름이나 기억을 지우고 싶어서가 아닐까 속으로 생각해 봤다. 페허가 되었던 기지에 혼자 연명캡슐 속에서 잠들었지 않았나?

"아니요. 당신네 함선이 없다고 말해서 그런 제안을 했을 뿐인데요?"

시유는 그 말 듣고 굳이 새 이름이 필요하겠나 생각을 해 보다가 혹시 사이오닉 능력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묻지 않았는데 대답을 했다면 분명하지만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신경을 끄며 탈출할 희망을 붙잡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합심한 덕분인지 함선은 예정보다 빨리 60%나 고쳐져 시범 운행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륙한다 영하 90도라는 바깥 날씨 때문에, 얼음 폭풍이 지나가는 대로 이륙하자고 결정했다. 물론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매일 밤마다 쳐들어오는 우르사돈도 변수였다. 그래서 시유는 최상위 포식자가 먹잇감의 냄새을 어떻게 맡는지 알고 싶어 소파에 앉아있는 카일린에게 물어보았다.

"카일린, 우르사돈 조사자료가 있다면 보여주실래요?"
"그건 왜 필요하시죠?"
"밤이 될 때마다 우르사돈이 우리 거주지를 습격해서 안 오게 만들 방법을 마련하려구요."

카일린은 피식 웃으면서 궁굼해하는 시유에게 대답했다.

"됐어요. 여긴 왠만하면 사신의 점프팩으로만 올 수 있는 곳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우리 나이가 비슷한데 슬슬 말 놓지 그래?"

예상대로 카일린은 사이오닉 능력자였다. 나이를 밝히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유령 사관학교에 입학되어야 하지 않은가? 왜 숨겨놨을까? 먼저 연명캡슐 건부터 물어보자.

"정말? 연명캡슐 속에 들어가서 나이가 높은 줄 알았는데...."
"캡슐 안에 들어갔다 해도 나이 많다고 오해하지 마. 나, 거기 한달 전에 들어갔었거든. 그리고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유령 사관학교에 안 들어가게 아빠가 로비를 걸었는데, 운 나쁘게 들켜서 죽은 가족 두고 도망쳐야 했거든. 그러다 여기까지 왔고....."

침울한 대답에 시유는 괜찮다는 식으로 손을 잡아줬다. 어처피 악감정으로 읽었다면 어제 분명히 이용했을 것이나, 하지만 지형을 소개할 정도면 자신을 믿는다고 봐야겠지?

"헤이븐으로 같이 가자."
"....고마워."

둘은 악수를 하며 친구가 되었다.
카일린 말대로 여기는 사신의 점프팩으로만 올 수 있다? 여태까지 우르사돈이 뛰어서 올라온 적 없으니까 한 시름 덜었네. 그래서 시유는 수송선으로 오르막길을 막고 아반나가 개발한 모든 전투 로봇을 언덕 가장자리에 배치시켜놨다. 분명 놈들은 밤에만 올 테고, 수송선과 로봇들은 한기에 면역이라 사람들은 편안하게 함선을 수리하거나 쉬겠지. 하지만 이건 오산이었다.

[시유야, 우르사돈 무리가 몰려들고 있어! 낮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뭐?! 얘내들 야행성 아니었어?"


[내 생각엔 얼음 폭풍이 그들을 활발하게 하는가 봐. 그리고 있잖아, 쌍안경으로 보기 전에 유카리가 인근 이탈자의 흔적을 조사해 봤는데, 얼음 폭풍으로 죽은 사람보다 우르사돈에게 당한 사람이 더 많대!]

젠장, 카일린의 동료들이 진영에서 이탈한 댓가가 이거라니... 며칠 전에 시유가 이탈하려는 사람들을 막지 못했더라면 그들도 이런 운명을 겪지 않았을까는 안도를 해 본다. 하지만 지금은 정찰 나간 둘이 그들에게 당할까 걱정이다.

"알았어. 옌허 너는 유카리와 가능한 빨리 기지 안으로 들어와. 나는 기지 방어를 보강해 볼게!"


[가능한 빨리 올 테니, 그 전에 길 좀 터놔.]

통신이 끝나자 바로 수송선을 양 사이드에 착륙시키고, 한 대당 전투 로봇 4대와 수리용 로봇 셋을 세워놨다. 오는 속도가 줄어들면 수리하여 튼튼이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려고 포탑 다수를 지으라 설정했다. 그러고는 함선을 향해 빠른 걸음걸이로 가면서 아반나에게 연락해 보았다.

"아반나, 함선은 어떻게 되고 있어?"


[응. 카일린의 대장이 비밀리에 수리를 했었는지 작업은 끝났어. 하지만 장갑은 폭풍에 버틸 수가 없는지, 0도가 되자마자 이륙을 해야 해.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토르로 시간을 벌어줄 사람이 필요할 수 있어.]

결국 누군가 기지에 남아야 한다는 뜻이잖아. 대장이 된 자신은 누구도 희생하기 싫은데 이걸 어떻게 하지? 옆에 서 있는 카일린에게 부탁하기도 싫고, 인정하긴 싫지만 대장이 희생해서 나가야 하는 운명이면 수첩을 오랜 친구인 옌허에게 줘야 할 판이다. 어처피 옛 대장이라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희생해야지."
"뭐? 여길 빠져나가자고 설득한 니가 우리 대장처럼 '그런 짓'을 하려고? 절대 안 돼!"
"그렇다면 누구처럼 다른 사람을 일회용처럼 버리라고? 대장은 원래 어려운 선택을 내릴 줄 알아야 해. 그리고 이게 내 선택이야!"

친구가 된지 몇 시간만에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남아야 한다.', '아니다. 원래 내가 여기 남아서 죽은 동료들에게 가야 한다,'는 말이 복도 곳곳에 들려왔지만 다행이도 주먹다짐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거의 말로 싸운다고 하지 않던가? 그게 이 10대 소녀라도 예외는 없는가 보다. 그렇게 서로 헉헉대며 휴전을 제의하려 했는데, 스피커에서 갑자기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때 시유로부터 도망치자고 여러분을 선동했던 사람입니다.]


"아니, 저 아저씨가 무슨 말을....."


[그땐 제가 어리석었지요. 이 얼어붙은 행성에서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왔던 행성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며칠 전에 시유와 아반나, 그리고 나마지 둘이 우르사돈을 막는 용기와 절 용서하는 시유를 보고 제가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저씨는 쉬러 가려다 우연히 복도에서 시유와 카일린이 서로 남겠다며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가 어떻게 방송국으로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며 방송실로 달려갔지만 그는 계속 이어갔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었답니다. 인생을 결정하는 데는 교육과 출생이 아닌 선택이라구요. 저는 여러분에게 무작정 떠나자고 외쳤었으나, 그날 밤에 시유가 보여준 용기를 보고 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칫하다 얼어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그중 하나가 저처럼 선동했겠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 미끼가 되려고 몰래 토르의 열쇠를 훔쳤습니다. 같이 떠나고 싶은 대장에겐 미안하지만, 방송실로 오지 않고 떠났으면 좋겠네요. 방송실은 잠가놨거든요.]

잠겨있다는 말에 불구하고 방송실 앞으로 달려온 시유는 즉시 문을 두드렸지만, 남자는 신경쓰지 않고 있는지 하던 말을 이어갔다.

[...도망치기 전에도 시유는 차기 지도자임을 증명했었으니, 우리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분을 잘 이끌어주리라 믿습니다. 이상으로 방송을 마칩니다. 시유야, 부탁이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함선으로 돌아가. 문 그만 두드리고 내가 속죄하게 해줘.]

방송이 마치자 시유는 흐느끼며 잠긴 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한 사람이라도 보내주기 싫었는데 어쩌다 이런 선택을 했는지.... 혼자여서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 한동안 이러고 있으려는데, 뒤따라온 카일린이 다가왔다.

"대장이라는 니가 여기서 그 한사람을 구해낼 수 없단 죄책감 때문에 주저앉아? 대장은 어려운 선택을 하고도 넘어갈 마음도 가져야 한다고 니가 말했잖아!"
"....카일린...."

시유는 그런 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눈가가 촉촉해졌다. 니가 안 가면 나도 남겠다는 그런 뜻으로 보이지만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부탁이니 내가 널 함선으로 끌고 가지 않게 해줘.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카일린이 왼손을 내밀어 이 행성을 함깨 여길 벗어나자며 시유를 위로해준다. 그래. 그의 방송대로 남은 수십명을 데리고 여길 떠나야 한다. 폭풍이 내일 지날지 모래 지날지 알수 없지만 이들에게 실망과 절망을 안길 수 있겠는가.

"...그래. 고마워."

손을 잡고 일어나 함선으로 달려간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도착하여 함선 마지막 점검과 식량 비축, 그리고 폭풍이 언제 지나갈지 예측해 달라며 미리 기다리던 올리버에게 부탁하려다 밖에 나갔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옌허, 유카리. 너희 도착했어?"


[응. 그나저나 한 사람이 부족한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용서했던 그 아저씨가 건물에 남겠대. 속죄한다지만, 안 해도 됐었잖아..."


[시유야, 나라도 그 선택을 존중했을지도 몰라. 그만 보내주자.]

무전을 마치자마자 우르사돈 욕을 하며 노아에 탑승했다. 올리버에 의하면 식량은 10일분이라 항로에는 문제 없다지만 역시 폭풍이 문제다. 또 튼튼히 설계했다고 생각된 방어시설도 언제 뚫릴지 모른다는 예상을 해야 하고.

"혹시 전투 로봇을 더 만들 수 있겠어?"
"불가능해. 함선을 손보느라 이제 로봇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원 뿐이야. 기적이 일어나길 바래야지."

함교에 선 아반나도 고개를 가로저어 기적을 빌었고, 유카리는 암담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우르사돈이 외벽을 부수고 오면 총 들고 싸우곘다는 사람도 적지 않아. 폭풍 경로를 봤을 때, 오늘 밤에 여길 도착할 거야."
"알았어. 유카리 너는 오늘 발생한 환자들을 안정시키고 있어. 난 함교애서 태블릿으로 폭풍 경로를 볼게."
"그래. 부탁이니 무리하지는 마. 며칠 전에 말했지만, 널 의료실로 옮기기 진짜 싫어."

시유는 '히히히.' 웃으며 들고 온 태블릿으로 폭풍 위치를 바라봤다. 떠나면 그건 의미 없지만 이륙할 때를 봐야 해서다. 그 아저씨의 선택을 저버릴 수 없고, 더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화면을 바깥 카메라로 전환해서 봤는데, 수송선을 때리면서 들어오려는 우르사돈 무리와 그를 막아서는 로봇들이 보인다. 빨라도 2-3일 뒤에 뚫리겠지만 함선 상태는 100%고, 폭풍만 지나준다면 그만이라 태블릿으로 날씨을 확인한다.

[경고. 온도가 영하 110도로 내려갑나다. 보온에 주의하십시오.]


"열기용 베스펜 가스량은?"


[2900 입니다. 이 정도면 보온에 문제 없지만, 이보다 더 메서운 추위가 몰려올 테니 한기에 대비하십시오.]

더 추워진다고? 이 행성의 기온이 왜 이리 잔혹한지.... 아니, 2900으로 버텨보자. 다 쓰고도 조금 남겠지만, 아반나에게 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시유야, 혹시 몰라 엔진 쪽을 봤는데, 가동시킬 모듈이 없어서 이륙할 수 없어. 찾으러면 건물 동력핵으로 가서 빼내야 해!]


"여기서 거리는 얼마나 돼?"


[가까워. 하지만 빼내자마자 건물 전력이 꺼진다는 변수도 고려해줘. 카일린이 한달동안 캡슐 속에서 잠들게 해준 건 다름아닌 동력핵이야.]

무전을 다 들은 시유는 고민을 했다. 카일린을 한달 동안 잠들게 해준 동력핵을 바로 빼자니 폭풍과 정전으로 인해 온도가 떨어질 테고, 그렇다고 모듈을 안 빼고 버티다 우르사돈이 들어오면 탈출은 실패다.

"...폭풍이 거의 지나갈 그 즈음에 빼내자. 내가 봤는데 새벽이면 반경이 아슬아슬하게 겹칠 거야."


[그래야겠어. 일단 신호를.... 앗, 방금 카일린이 함선 문을 열고 나왔어. 동력핵을 가지러 가려는가 봐!]

이 멍청이가 아직 때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시유는 즉시 무전기 주파수를 카일린 쪽으로 맞추려고 했으나, 다른 사람이 받은 바람에 머리를 쥐어싸야 했다. 아직 폭풍 범위권인데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다.

"화염차 상태만 좋았더라도 추위를 막았을 텐데."

화면에서 표기된 기온은 영하 120도. 이 시기에 동력핵으로 가서 모듈을 빼다 카일린이 얼어버리면 헛수고다. 장비라도 갖췄는지 의문스럽고. 바깥 상황이 궁금해서 전환했는데, 로봇 몇몇이 망가지고 말았다. 언덕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봤다.

"무슨 우르사돈이 점프를 해!"

여태껏 봐 왔던 커다란 우르사돈 둘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뛰어 들어왔다. 주위를 보니 다른 벽이 허물어졌고, 전투로봇을 보내도 한 발 늦었다. 폭풍이 오든 말든 들어오면 총이라도 쏴야 하는 상황. 죽을 위험도 있지만 어쩌겠나?

[경고. 건물 동력핵에서 모듈이 제거되었습니다. 곧 전력이 차단되어.......]


"카일린이야. 아직 때가 아닌데 왜 그랬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건물 안을 한 없이 바라본다. 몇 분 동안 살짝 얼어붙은 기지 외벽을 바라보던 그때였을까. 갑자기 익숙한 대포 소리가 들려서 확인해 보니, 여기에 남겠다는 방송을 하던 아저씨가 토르에 타서 우르사돈을 향해 포를 막 쏴 댄다.

"혼자서 몰기 힘들 텐데, 괜찮으실까..."

한때 시유가 우르사돈을 막으려고 가동된 토르는 혼자 몰기엔 좀 그런 기능이 있다. 운전하는 조종사와 거리를 측정하는 사수가 타야 효과가 발휘되는데, 조준하지 않고 쏘면 빗나가기 일쑤였다. 이를 알면서도 혼자 탑승한 그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 포를 짐승들에게 발사하여 막아냈다.

[어디 와 봐라! 니들 상대는 바로 나다!]

로봇 잔해을 밝으면서 커다란 우르사돈이 토르를 향해 달려갔지만 포를 쏴 기지 쪽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래서 뒤에 오는 다른 짐승 하나가 동료를 밟아 토르를 향해 도약했고, 예상하지 못한 그는 발톱으로 인해 갈가리 찢겼고, 끝내 만족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안녕히 가세요. 이름을 묻지 않아 모르지만, 대장님을 만난다면 이 말을 전해주세요. 이제 누가 죽었다는 시련이 다가와도 슬퍼하거나 망설이지 않을 테니."

이제 결단을 내릴 시간이다. 여기서 싸우다 죽을지, 무작정 도망칠지를 말이다. 하지만 전자를 선택한다 해도 카일린이 와야 하는데, 얘는 왜이리 안 오는지.... 동력핵에서 오다 얼어붙지 않았나 걱정되어 가보려는 그때, 익숙한 무전 소리와 함께 함선 화면이 켜지기 시작했다.

[시유야, 카일린이 모듈을 무사히 가져왔길래 모듈을 끼웠어. 함선 내 온도가 올라갈 거야.]


"그러면 뭐해. 활주로야 야마토 포로 열면 된다지만 환자가 많이 생겼을 텐데....."


[알립나다. 곧 폭풍이 지나갑니다.]

곧 폭풍이 지나간다! 그렇다 해도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이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우르사돈이 점점 건물을 부수고 있어서 함선 밖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 방금 켠 함선 보온으로는 무리인가.... 그렇다고 함선의 난방 기능이 최대치라 더 높일 수 없다. 이제 남은 건....

"....함선 무기를 가동시켜. 우르사돈이 들어오면 발사한다."


[무기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그래. 운에 맡겨보자. 놈이 먼저 들어올지, 아니면 폭풍이 지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함선 내 마이크를 잡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옌허와 같이 놀던 순간부터 예전 대장 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던 일, 행성 탈출을 하게 만든 억압, 대장이 되어 겪었던 시련들, 그리고 지금에 대해서....

[우르사돈이 함선으로 오기까지 약 70미터 남았습니다.]

부관이 말해도 계속 노래를 부른다. 물론 우르사돈을 대비하려고 발사 장치를 손에 댔는데, 뒤이어 옌허, 올리버, 유카리가 와서 같이 부른다. 급조된 노래라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지는 상관 없다. 그냥 불러보자. 토르에 타서 미끼가 된 죽은 조종사를 기억도 해 본다.

"노래 좋네..."

모듈을 갖다놓고 함교로 들어온 카일린이 웃으면서 화음을 넣어본다. 이 노래가 기적의 노래인지 모르지만 동상보단 낫겠지. 후렴부에 도달하려던 그 순간, 앞에서 거대 우르사돈 하나가 벽을 뚫고 들어왔는데, 막 폭풍이 지나서 날이 따뜻한지 다.

"....다신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게요."

마지막 구절과 함께 엔진을 가동하며 짐승에게 레이저포를 쐈다. 야마토 포를 쓰기엔 낭비인 데다, 비행하는 데는 그다지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이제 이 절망으로부터 안녕이다.

 

얼음 행성에서 멀어지자마자, 시유는 눈물을 흘리며 수첩 표지를 바라봤다. 어디로 갈지는 항로를 결정해 놨는데, 어째선지 자꾸 눈물이 흐른다. 아는 사람 둘을 수습하지 못해선지, 이륙할때 부른 노래로 인한 울컥함이었는지는, 혹은 둘 다인지 그치지 않았다.

".....정말 노아가 이륙했구나."

카일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눈물 흘리는 시유 옆에 비켜줬다. 얼핏 보면 자기 동료를 위해 대신 슬퍼하는 것 같아 함선 새 이름을 짓겠나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로. 혼자 있음을 안 시유는 대장에게 받은 수첩을 꺼내며 독백을 시작했다.

"....고마워요. 이 사람들을 여기서 벗어나게 가르쳐줘서. 보답으로 이 함선을 당신 이름으로 지을게요. 그리고 헤이븐 거주민이 된 이후로 당신을 위해 계속 노래할게요. 그러니 거기서 친구분들과 함께 편히 쉬세요."

시유는 수첩을 집어넣고 희망을 품은 미소로 함교 앞을 바라봤다. 거기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노랫가사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으리라. 

 

에필로그

헤이븐에 도착하고 3년이 지났디. 피난민 대장에서 노래 강사가 된 시유는 녹음실에서 한번 TV를 틀었는데, 새 자치령에서 각종 개헉안을 발표하는 뉴스를 접하고 피식 웃었다. 2년 전만 해도 저그와 뫼비우스 놈들에게 피해를 입어 재기될 가망이 있을까 하는 어두운 시긴을 걸었던 자치령이 이렇게나 좋아졌다니.

"그래도 다시 자치령으로 돌아가기 싫다아..."

여기가 오히려 좋은데 뭐하러 옛 고향으로 돌아가겠나? 그리고, 아크튜러스가 죽기 전에 계측되었다던 그 얼음 행성도 더는 지나가기 싫다. 적응하는데 도와준 아그리아 거주민인 유니와 박대현, 덱스 등을 가르쳐야 하고.

"언니들- 저희 왔어요."
"응. 어서와."

인사하는 시유에 옌허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조심스레 속삭였다.

"지도자에 어울리는 네게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누가 알겠어?"
"한때 바이크를 몰던 너도 같은 강사잖아, 옌허."

서로 큭큭 웃으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갖고 있는 악보집을 펼쳤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자. 오늘은 3년전에 내가 지은 노래를 배워볼까?"

시유는 웃으면서 그 행성에서 즉흥으로 작곡한 노래가 적힌 악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에 오후 강사인 아반나와 유카리, 심화반 강사 올리버, 그리고 보충반 강사인 카일린과 같이 착륙했던 곳으로 가서 보게 될 석양이 어떤 색인지 한번 상상을 해 본다. 아마 헤이븐에 착륙했던 3년 전처럼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악보를 펴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교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그쪽으로 바라보았다.

"응? 박사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들어온 손님은 검은 머리에 안경을 쓴 아리엘 핸슨이었는데, 한때 아그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거주지 문제를 해결하고 저그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박사였다. 그런데, 작년에 보관 중이던 표본이 사라진 뒤로 연구를 못해 헤이븐 내 테란 대표로 활동 중이다.

"지나가다 보이길래 잠깐 왔어. 수업 중이라면 내가 방해했니?"
"아뇨 아뇨. 막 시작하려는 차였어요."
"그렇구나. 그럼 오늘도 수고해."

박사가 떠난 모습을 본 시유는 '그럼 시작할까?'며 박수를 쳤는데, 대현이가 가사를 보고 울컥했는지 눈물 닦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시유 누나, 오늘 그 노랫가사를 봤는데 좀 슬펐어요.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아, 그거 말이야...."

옌허에게 눈짓으로 말하자, 친구에게서 '들려줘도 되겠지.'라는 수신호를 받았다.
그럼 어디 한번 '어느 대장'의 이야기를 이야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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